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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6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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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후는 1694년 출생하여 조선 영조 때 활동한 문신이다. 음보로 관직에 진출하여 문과에 급제한 후 영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호남균전세사, 승지, 경상도관찰사, 이조참판,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했다. 사도세자를 보호하려 했으나 평양 원유 사건으로 책임을 지고 영의정, 우의정과 함께 음독자살했다. 시호는 정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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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694년)
일반 정보
연도1694년
달력
율리우스력1694년
간지
간지갑술년(甲戌年)
연호
강희(康熙) 33년
일본겐로쿠(元禄) 7년
후 레 왕조찐호아(正和) 15년
발생
3월 21일조선 숙종과 희빈 장씨 사이에서 왕자 윤이 태어나다.
5월 16일볼테르,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 작가 (사망 1778년)
6월 9일니콜라이 1세,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제11대 황제 (사망 1855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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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4일장 니콜라스 드 파르발, 프랑스 극작가 (출생 16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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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불명프란체스코 코차리니, 이탈리아 화가 (출생 1605년)

2. 생애

이후(李㷞, 1694년 ~ ?)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이다. 음보로 관직에 진출하여 목사를 지내다가 문과에 급제한 후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호남균전세사, 승지, 경상도관찰사, 호남균세사, 대사간, 동지의금부사, 한성부우윤, 경기도관찰사, 이조참판,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을 지내고 좌의정에 이르렀다. 사도세자를 보호하는 입장이었으나, 사도세자 평양 원유사건으로 인해 세자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영의정, 우의정과 함께 음독자살했다. 김상로, 홍봉한, 신만, 김약로, 정석오, 신회, 이천보, 민백상과 가까웠다. 시호는 정익(定翼)이다.

2. 1. 초기 관직 생활

이후는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여 목사를 지냈다. 이후 문과에 급제해 영조의 총애를 받아 호남균전세사 등을 지냈으며, 승지, 경상도관찰사, 호남균세사를 거쳐 대사간, 동지의금부사, 한성부우윤, 경기도관찰사, 이조참판을 역임했다.

2. 2. 주요 관직 역임

이후는 음보로 관직에 진출하여 목사를 지내다가 이후 문과에 급제해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승지, 경상도관찰사, 대사간, 동지의금부사, 한성부우윤, 경기도관찰사, 이조참판 등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고, 호남균전세사로 재직 시에는 균전세(均田稅) 정책을 시행하여 백성들의 조세 부담을 경감시키려 노력하였다.

2. 3. 좌의정 임명과 활동

이후는 음보로 관직에 진출하여 목사를 지내다가 이후 문과에 급제해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호남균전세사, 승지, 경상도관찰사, 호남균세사, 대사간, 동지의금부사, 한성부우윤, 경기도관찰사, 이조참판을 지냈다. 그 후 병조판서, 이조판서,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사도세자를 보호하는 입장이었지만, 사도세자 평양 원유사건이 터지면서 세자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영의정, 우의정과 함께 음독자살했다.

김상로, 홍봉한, 신만, 김약로, 정석오, 신회, 이천보, 민백상과 가까운 사이였다. 시호는 정익(定翼)이다.

2. 4. 사도세자 사망 사건과의 연관성

영조의 총애를 받으며 호남균전세사 등을 지낸 이후는 사도세자를 보호하려 노력했지만, 사도세자 평양 원유사건이 발생하면서 세자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는 책임을 느끼고 자결했다. 그는 김상로, 홍봉한, 신만 등과 가까운 사이였다.

이후의 자결은 단순한 개인적 비극이 아니라, 당시 조선 사회의 정치적 갈등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특히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당파 간의 대립은 극심했으며, 이후는 이러한 갈등 속에서 희생된 인물 중 하나로 평가된다.

3. 정치적 성향 및 인간 관계

김상로, 홍봉한, 신만, 김약로, 정석오, 신회, 이천보, 민백상 등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입장이었고, 이종성 역시 사도세자를 보호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사도세자가 평양으로 원유(遠遊)를 떠나는 사건이 발생하자, 세자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는 책임을 지고 영의정, 좌의정과 함께 음독자살하였다.

4. 평가

이종성은 음보로 관직에 진출하여 문과에 급제한 후, 영조의 총애를 받으며 여러 요직을 거쳤다. 경상도 관찰사, 한성부 우윤, 경기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며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고,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까지 올랐다. 이는 그가 뛰어난 능력과 성품을 겸비했음을 보여준다.

사도세자를 보호하려 노력했지만, '사도세자 평양 원유사건'으로 인해 세자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음독자살했다. 이는 당시 정치적 상황의 비극성과 이종성의 충절을 동시에 보여준다. 김상로, 홍봉한 등 당대 주요 인물들과 가까웠다는 점은 그가 붕당 정치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종성은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치고 왕을 보필하는 데 헌신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사도세자 사건에서 그의 역할은 한계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 및 진보 진영에서는 이종성의 애민 정신과 개혁적 면모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당시 시대적 상황과 정치적 갈등 속에서 그의 선택이 갖는 한계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5. 시호

이종성에게 내려진 시호는 '정익(定翼)'이다. '정익'은 나라를 평안하게 하고 백성을 다스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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